태양과 가장 가까운 곳을 도는 행성이 있습니다. 언제나 빛에 가장 먼저 닿지만 스스로는 빛나지 않습니다. 가장 빠르게 움직이지만 하루는 오히려 가장 깁니다. 한쪽은 타오를 듯 뜨겁고, 다른 한쪽은 영하의 어둠 속에 얼어붙어 있습니다.

그렇게 모순으로 가득한 행성이지만, 수성은 궤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뜨거움과 차가움, 밝음과 어둠의 경계에서 묵묵히 하루를 이어갑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지금 이 시기를 살아가는 여러분의 하루와 닮아 있습니다.

수능이 39일 앞으로 다가온 지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데 마음은 오히려 느려집니다. 달력의 남은 장은 얇아지고, 하루는 점점 무거워집니다. 처음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매일 밤 차오르는 결심이 있었고, 내일은 조금 더 단단해질 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다짐들이 무게를 잃고, 어제의 피로가 오늘의 마음을 덮기 시작했습니다.

책상 위의 펜은 여전히 움직이지만, 마음속의 불씨는 자꾸 식어갑니다. 하루를 버텨내는 일이 점점 더 고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공부는 여전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어느새 ‘견뎌야 하는 일’이 되어 있습니다. 하루의 끝에 스스로를 다독여도, 내일의 시작은 여전히 두렵게 다가옵니다.

그럴 때면 괜히 자신이 멀어진 것만 같습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미 한참 앞서 있는 것 같고, 나만 제자리에서 맴도는 듯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멈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성의 하루가 긴 이유는 멈춰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빠르게 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 가까이에서 쏟아지는 빛을 받아내느라, 수성은 천천히 하루를 넘깁니다. 여러분의 느림도 그와 같습니다. 지금의 답답함은 정체가 아니라 밀도입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 있기 때문에, 아직 그 빛을 다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가끔은 그 사실을 잊고 자신을 다그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될까?”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못한 것 같아.” 

그런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오릅니다. 

하지만 태양 가까이에 있는 수성이 가장 깊은 그림자를 가진다는 걸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림자가 짙을수록, 그만큼 빛이 강하게 비추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때로는 한 걸음을 내딛는 일조차 버겁습니다. 작아진 발끝을 내려다보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 겨우 한 걸음을 내딛는 일. 그 작은 한 걸음이 전부인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 걸음이야말로 궤도를 이어가는 힘입니다. 

미끄러질지도, 헛걸음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움직이는 사람만이 언젠가 도착합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끝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무사함은 포기가 아니라 끝까지의 책임입니다. 

불꽃은 잠시 세상을 밝히지만, 새벽을 건너는 건 불꽃이 아니라 온도입니다. 크게 타오르지 않아도 식지 않고 남은 열이 결국 어둠을 통과시킵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미지근해지고, 다짐은 닳아갑니다. 그러나 온도는 그렇게 생겨나고, 사라진 다짐은 흔적처럼 남아, 새로운 열로 변합니다. 

오늘의 망설임, 

오늘의 침묵, 

오늘의 고요한 포기,

그것들 조차도 내일을 향한 미약한 움직임입니다. 

그렇게 하루가 쌓이고, 또 하루가 더해지면서 사람은 자신을 믿는 법을 배웁니다.

오래전의 열정이 나만 비껴간 듯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속도는 빛처럼 빠른데, 내 그림자만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림자가 길어진다는 건 여전히 빛이 비친다는 뜻입니다. 

빛이 없다면 그림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늘은, 여전히 해를 향해 서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그림자가 조금씩 짧아질 때, 여러분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줄어든 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빛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자신만의 궤도를 묵묵히 따라가다 보면, 기다림의 끝에서 마침내 태양이 도착합니다. 그 빛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사실은 언제나 여러분 곁에 있었고, 여러분을 조금씩 데워왔던 온기였음을, 그제야 알게 될 것입니다.

수성의 하루는 길고 고요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끊임없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가장 자주 어두워지지만, 그만큼 누구보다 뜨겁게 빛을 받습니다. 여러분의 하루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어둡고 길게 느껴질지라도, 그 길 위를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에게 언젠가 가장 따뜻한 빛이 머물 것입니다.

오늘의 불안과 피로는 결국 그 빛을 더 환하게 반사하기 위한 준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도 괜찮습니다. 

무너질 듯 앉아 있더라도, 그 자리가 여러분의 궤도입니다. 조용히 숨을 고르고, 다시 한 줄의 문장을 외우며 하루를 닫는다면, 그 자체로 이미 빛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이 길고 고요한 하루가 끝나는 날, 여러분이 맞이할 그 새벽의 한때는 분명 따뜻할 것입니다. 빛은 기다림을 견딘 사람의 얼굴 위로 가장 오래 머물 것이고, 그 순간 여러분의 이름에도 그 빛이 머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벽의 문턱에서, 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여러분이 걸어온 하루들 위에 제 문장이 닿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조금의 온기와 약간의 숨결을 남긴 채, 다음 REPLAY에서 다시 만나겠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빛을 바라보며, 각자의 궤도에서 하루를 이어가고 있을 테니까요.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가장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태양은 언제나 천천히 도착합니다.

타오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식지 않고 버틴 시간은
이미 빛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그 빛이 닿을 때,
여러분의 하루가
따뜻한 온도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온기 속에서
당신의 이름이 다시 피어오르는
그 새벽의 한때.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던

매일 밤 차오르는 마음은
아물지 못하는 어제를 끌어안고
썩어버린 채 말이 없네

작아진 발을 보고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한 걸음을 떼자마자
숨이 좀 씨근거려

비뚤게 웃어보고
한참 몸서리치다
아무 대답도 없을 말들을
혼자서 주절거려

미끄러지기만 할 텐데 뭐할라고
아직 절반도 안 살았는데

커다란 하늘에 눈가가
시큰거려 만들어낸 다짐은
누군가 지어낸 말이었던 것 마냥
이젠 아무 쓸모가 없네

말을 걸어오든 문을 두드리든
목을 숨기고 모르는 체해
미지근해져도 닳아서 헤져도 좋아
무사히 끝낼 수만 있다면

들켜버릴까 숨만 죽이는
비겁한 하루를 바랐던가?

오래전 놓았던 자그마한
불씨가 어딘가를 태워도
좀처럼 나에겐 옮겨붙지를 않고
그림자만 길어지네

그렇게 매일을 이어가다
마침내 이 더러운 꿈을 깰 때
그때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일 거야

'참으로 가여운 사람

무엇 하나 삼킨 것이 없네'

그저 나 이렇게
숨만 쉬고 살아도
정말 괜찮은 걸까?

마치 한 걸음도
떼지 못한 것 마냥
언제나 이 자리에

무엇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아
허나 차오르는 마음들
아물지 못하는 오늘을 끌어안고
모든 것은 내일의 몫으로

그렇게 하루를 이어가다
어김없이 맞는 새벽의 한때 

 

Thorn Apple <수성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