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열기가 서서히 물러가고,
아침에 일어나면 긴팔 옷을 꺼내 입어야 할 때가 왔음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우리의 마음 한구석은 회색빛으로 흐려져 있는데,
문득 올려다본 높디높은 가을 하늘은 구름 없이 푸르기만 합니다.
9모가 끝난 지 일주일 정도 지났네요.
시험 당일의 지독했던 충격과 후유증은 조금 가라앉고,
이제는 냉철한 이성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을 거라 믿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척 샤프를 쥐고 있어도,
“될까?”, “수능 때도 이러면 어쩌지?”라는 불안이 갑자기 들곤 하죠.
사실, 작년 요맘때의 저 역시 똑같은 고민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혹시나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Q&A 게시판에 올렸던 고민 글을 하나 보여드릴게요.
안녕하세요. 계속 고민하다가 혹시나 해서 질문드립니다.
6모 때 독서1, 언어1, 매체1 틀려서 원점수 92점이었고, 9모는 독서 5번, 6번, 15번, 문학 24번, 언어 35번, 36번, 38번 틀려서 원점수 84점을 맞았습니다.
저는 순서대로 문제를 푸는데 시간은 독서 문학 언매 각각 29분 33분 16분 걸렸습니다.
작수 72점으로 4등급이었고, 약점을 극복하고 싶은 마음에 겨울부터 6모까지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6모에서 1등급이 나왔지만 시험이 쉬웠고, 고정 1등급이 되고 싶은 마음에 6모부터 9모까지 수능특강 언매, 강기분문학(복습지문), 강e분n제시즌1, 새기분 문학, 새기분 독서(복습지문), 강평업문학, 강기분언매 문제편, 이감시즌5, 간쓸개 3권, 무제 4주차까지 다 풀었습니다.
위에 썼던 커리 거의 대부분 강의도 들었습니다.
매일 꾸준히 3~4시간 국어 공부했지만 이번 9모에서 압도당했습니다.
긴장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독서 지문을 읽는데 읽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번 9모에서 독서 틀린 문제를 보면 “왜 저런 걸 틀렸지?”하며 너무 자괴감이 들면서, 수능 때 이것보다 어려운 독서 지문이 나올텐데 하는 두려움이 듭니다.
문학은 나름 잘 풀었지만 현대소설에서 막혀, 33번 34번 문제에 시간을 너무 쓰느라 선택과목을 제대로 풀기 힘들었습니다.
언어는 가장 약한 과목이라서 어려운 건 다 틀렸습니다. 이것도 극복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하는지, 조사와 접사를 외워야 하나, 그럼 어디까지 외워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9모 전날에 선생님께서 예열지문으로 올린 3세트 모두 다 풀어서 갈만큼 너무 간절했는데 9모에서 처참히 깨지니까 여태껏 해왔던 국어 공부 방향성에 회의가 듭니다.
앞으로 어떻게 노력해야 방향성이 맞을까요?
아님 이대로 방향을 유지하며 가도 올바른 방향성인가요?
작년 9모 끝나고 Q&A에 올렸던 질문입니다.
아마 지금 이 글을 읽으며 “나도 그랬는데” 하고 공감하는 친구가 꽤 있을 겁니다.
수능 4등급에서 6모 92점을 찍었을 때, 저는 제가 국어 실력이 1등급으로 올라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험이 쉬웠기에 자만하지 않고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국어에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9모에서 2등급으로 미끄러졌을 때 느꼈던 감정은 단순한 아쉬움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여태껏 푼 문제집과 쏟아부은 시간은 다 헛수고였나?' 하는 지독한 배신감과 회의감이었죠.
그때는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올해 목표달성장학생 활동을 하며 여러분의 고민을 마주하다 보니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저만의, 혹은 여러분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 좌절은, 치열하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야만 하는 필연적인 성장통이었습니다.
당시 제 질문에 대해 조교님께서
“그동안 고생 많았고, 앞으로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답변을 남겨주셨을 때
“정말 그럴까?”라는 의문과 동시에 머릿속을 계속 맴돌던 불안이 한결 나아졌던 기억이 납니다.
평소 제 칼럼을 읽는 여러분도, 그때의 저처럼 조그만 숨구멍을 얻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대학생이 된 지금도 매일 느끼는 것 중 하나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입니다.
그것은 일상의 불만족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지만,
동시에 인생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 됩니다.
우리가 사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행복입니다.
하지만 인정합시다. 수능 공부를 하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행복한 순간은 당연히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20분 동안 고민하다 맞혔을 때,
저번 시험보다 점수가 올랐을 때
하지만 이런 순간보다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더 많습니다.
불안과 지루함, 만성 피로가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죠.
김연아 선수의 유명한 인터뷰가 있습니다.
스트레칭을 무슨 생각 하면서 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공부를 시작할 땐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그러나 수능이 두 달 남은 지금,
거창한 동기부여는 오히려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되곤 합니다.
공부하면 행복하지 않고, 공부한다고 해서 꼭 좋은 대학에 간다는 보장은 없거든요.
초기에 품었던 이상과 지금 행동 사이의 괴리가 느껴집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처음 공부를 시작했던 이유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담담한 관성’입니다.
그동안 계속 해왔으니까,
별다른 이유를 붙이지 않고 ‘그냥’ 하는 거죠.
대학에 가도 또 다른 경쟁과 고민이 기다립니다.
사실 저는 아직까지 대학에 와서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했습니다.
작년에 상상했던 대학 생활과 큰 차이에 실망을 느꼈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종종 마주합니다.
하지만 작년의 수험 생활 동안 버텼던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도 끝이 있다는 믿음으로 ‘그냥’ 묵묵히 하루를 보냅니다.
때로는 여러분에게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꺼낼 때면 저는 괴리를 느낍니다.
나 또한 행복하지 않은데 수험생에게 행복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거죠.
이 행복하지 않은 수험 생활,
더 크게 보면 인생을 우리는 어떻게 버텨야 할까요?
거창한 행복을 좇기보다는,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는 틈새를 억지로라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버킷리스트
여러분은 수능 끝나고 꼭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가 있나요?
앞서 말했듯, 수험 생활 중 행복한 순간은 많지 않아서
억지로라도 소소한 행복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소소한 행복 중 하나가 저에게는 버킷리스트를 적는 거였습니다.
그동안 버킷리스트를 얼마나 달성했나 보니,
절반 정도 달성하고 절반은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수능 끝나고 가장 먼저 달성한 것이 ‘버거킹 35200’인데요.
35200이란, 버거킹에서 가장 비싼 세트 메뉴를 시키고 토핑을 최대로 추가했을 때 나오는 금액입니다.
양이 정말 많더군요.
이거 다 먹는데 한 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반면, 아직 이루지 못한 리스트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배스킨라빈스에서 가장 많은 맛을 담을 수 있는 하프갤런을 시켜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맛인 '31요거트'로만 가득 채워 주문하는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할 수 있지만, 왠지 그동안은 내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단순하고 완벽한 행복을 아껴두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연말, 진짜 행복이 필요할 때 시도해볼 생각입니다.
여러분도 공부하다 지칠 때 메모장에다 이번 연말에 시도할 버킷리스트를 구체적으로, 즐거운 상상을 하며 적어보세요.
그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길 바랍니다.
Struggling
작년 제 플래너에 가장 많이 쓰여있는 단어입니다.
많이 아플 때마다, 불안감에 빠질 때마다
플래너 귀퉁이에 이 단어를 짓이기듯 적어 넣었습니다.
점수나 대학 간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빛이 바랠지 몰라도,
불안 속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계획을 지켜냈다는 그 기억만큼은
앞으로 여러분이 살아갈 모든 계절에서 단단한 방패가 되어줄 테니,
단연코 오늘 책상 앞에서 유혹, 불안과 싸우는 투쟁이
훗날 여러분을 지키는 가장 큰 자산이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25년 11월 14일, 수능 다음날 찍은 사진
제가 수능 다음날 맞이했던 그 서늘하고도 고요한 날씨를, 머지않아 여러분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그저 묵묵히 걸어가세요.
Wish you 행복.
#추신
오늘은 제 생일입니다.
만약 제게 주어진 소원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책상 앞에서 투쟁하고 있을 여러분의 하루가 조금 덜 무겁기를,
그리고 다가올 수능 날 아쉬움 없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기를 빌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진정으로 행복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