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공해> EP.1 이** 학생의 고민입니다.
'안녕하세요 멘토님! D-100 앞두고 있는 고3입니다..ㅎㅎ 저는, 스스로를 자꾸 남들과 비교하는 안좋은 습관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요... 그래서 제가 남들보다 잘하든 못하든간에 맘놓고 좋아하기가 조금 어려운 것 같아요. 전국엔 저보다 잘하는 사람이 널렸을텐데 고작 이번 한 번 잘했다고 좋아하는 스스로가 좀 부끄럽거든요 ㅠㅠ.. 멘토님은 보통 이럴 때 어떻게 하셨나요? 남들과 비교가 될 때, 그래서 주눅이 들 때는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비교는 자기 자신을 한없이 갉아먹지만, 완전히 끊어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특히 매순간 숫자와 등급으로 평가받고, 누군가의 등급이 떨어져야 나의 등급이 올라가는 '등급의 세계'에 살고 있는 수험생들에겐 더더욱 그렇지요. 노력해서 성적을 올려도, 또다시 그 위에 있는 사람들만 보이는 것이 어쩌면 너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될 때,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지칠대로 지쳤을 때조차도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 공부 못하는 애
저의 이야기를 잠깐 해보겠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 아주아주 멋진 어른이 될거라고 확신하며 사는 당돌한 아이였습니다. 초등학교에서는 모든 대회에 다 나가 반드시 1등을 해야만 했고, 고학년 내내 전교 부회장과 전교 회장을 맡았습니다. 또 성적표에 '매우잘함'이 아닌 '잘함'이 하나라도 적히는 걸 용납하지 못했죠.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하나고에 입학하겠다는 목표 하나로 미친듯이 내신에 집착하고 혼자 3호선의 끝과 끝을 가로질러 대치동에 다니며 고등학교 입시를 치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교 3등으로 졸업하며 짧은 생의 유일한 목표였던 하나고 입학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때까지는 '비교'라는 것이 저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비교를 해봤자 나보다 잘난 애가 몇 없고, 내가 간절히 바라고 그에 걸맞는 노력을 한다면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만으로 가득차있던 제 삶은 하나고 입학과 동시에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나의 유일한 자부심이었던 성적과, 숫자와, 트로피 같은걸 더이상 얻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저는 하나고에서 성적이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고1 중반부터는 내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과 왜 나는 이것밖에 되지 않느냐는 자기혐오에 깊이 빠졌습니다. '비교'의 대상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그 비교의 경쟁에서 저는 언제나 패배자였습니다. 어떤 분야를 골라도 나보다 그걸 월등하게 잘하는 친구가 늘 있었고, 저의 포지션은 공부 못하는 애, 담임 선생님의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물론 친구들은 알지 못했죠. 그곳에선 나의 약점을 밝혀서 좋을 것이 없었고,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괜찮은 척, 잘 살아가고 있는 척하며 혼자서만 끙끙 앓았습니다.
그게 누구든 남들이 내뱉는 말을 글자 단위로 쪼개어 의미부여하고, 으깨질 것 같이 흘러내리는 마음을 겨우 부여잡느라 보는 것만으로도 따가운 내 손은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을 휘젓고 이제는 질려버린 나의 다정은 남는 것도 없는 채로 여전히 소모됩니다. 울상이 되어버린 그림자를 짓누르고 애써 웃어보이던 난 오늘도 잠시 좌절합니다. 오래 버텨온 이를 눈물 짓게 할만큼 끔찍한 이 세계에서는요, 좌절은 뒤쳐짐의 원동력이 되고 무기력은 명백한 죄가 됩니다.
이 바보같은 여정도 언젠가는 끝이 날까요. 그때까지 나는 얼마나 더 울렁거리고 얼마나 더 흐느껴야 할까요. 아니 애초에, 언젠가 끝이 날거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나요.
...
성적과 자존감을 분리하라는 말은 너무 무책임합니다. 원래도 우울감을 느꼈냐는 질문에 나는 - 네. 그런데 그때는 공부를 잘했으니까요. 문제가 될 게 있나요 -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는 사실 나를 사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나 못나고 가진 것 하나 없는 나를 왜 내가 사랑해야 하나요. 나는 누가봐도 사랑받을 만한 모습의 나를 사랑하고 싶고 나는 동정이 아니라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썼던 일기의 일부입니다. 한눈에 봐도 비교와 좌절, 우울, 그리고 무력감만이 가득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부정적인 감정들이 빠져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뭔가라도 바꿔보겠다고 매일 노력했고 악착같이 새벽에 일어나 면학실의 불을 켰습니다. 하지만 성적 상담때마다 선생님께 듣는 말은 '넌 공부에 대한 독기가 없다.' '지금 너 성적으로는 00대도 못간다'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와중에 저는 남들이 하는 건 다 따라해보겠다고, 방학마다 대치동 학원에 다녔습니다. 집에서 대치동까지 등하원을 하기에는 너무 멀었기에, 단기 자취방을 얻어 방학동안 혼자 살아보기도 했고 관리형 학사에서 보낸 방학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싼 하나고 학비와 방학마다 들어가는 비용을 지원해주시는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이 항상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부정적인 생각들에 빠져 의미없이 흘려보낸 날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수학, 과학 심화과목의 '기본 개념'을 따라가기에도 벅찼고, 그거라도 따라가보려고 애쓰다가 좋아하던 국어,영어 성적은 늘 애매했고, 그래서 늘 부족한 나 자신에 대해 마음이 불편해야 했던 이 시기를, 혼자서 오래 울기에는 너무 차가웠던 화장실 바닥을, 불꺼진 기숙사를 솔직히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좋았어
그런 저를 다시 나아가게 했던 것은 어떠한 결과나 성적 상승이 아닌 '공부를 열심히 해봤던 경험'이었습니다. 평생을 뭔가 열심히 하며 지내온 스스로를 저는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신에 반영되는 3학년 1학기가 끝나고 나서는 남들이 다 간다는 대치동, 남들이 다 다닌다는 학원을 따라다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3학년 여름방학에는 학교에 잔류하는 것을 선택했고, 나의 루틴과 나의 방식이 생기니 오히려 더 편하게 확신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학기에는 수능 최저를 맞추기 위해 수능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이 시기야말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았던 시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그 과정에 대한 결과가 '수시 6광탈. 소속대학 없음'으로 이어졌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만족스러운 마지막 학기를 보냈다는 이유로, 실패한 입시 결과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 부모님, 친구들의 반응 그리고 무엇보다 '역시 열심히 해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구나'라는 또 한 번의 실패 경험은 이제 막 스무살이 된 아이가 겪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일년이 지난 지금은 고려대에 와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저를 한 번 더 믿고, 용기를 내어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스무살의 저는 가진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소속 대학이 없었고, 모종의 개인사로 미래에 대한 조금의 기대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또다시 나를 버릴까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한 번 더 해볼 수 있었던 것은 단언컨대 남들의 반수 성공 사례도, 남들에 비해 비교적 괜찮은 공부머리를 가졌다는 사실도 아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열심히 해봤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3학년 2학기에는 고려대 학종우수 최저를 맞추는 것이 하루를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고, 비록 그 목표를 이루는 것에 실패했지만, 그 시기로부터 제가 목표를 위해 정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반수 기간동안, 하루하루 너무 무섭고 간절해서 밤잠을 설쳤던 열아홉살의 내가 그랬듯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보내는 것이 바로 제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다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만 같은 나를 마주했을 때 다시 일어서 살아가게 할 힘이 되어줄 것이라는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여러분들께 저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하나고 졸업, 고려대 재학이라는 괜찮은 타이틀을 가진 사람도 스스로를 한없이 혐오하고, 깊은 우울에 빠져 비교로 나를 갉아먹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공부 못하는 애로 고등학교 3년을 살았던 경험, 입시에서 실패해본 경험이 제 삶에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오만과 불필요한 자신감에 빠진 우물 안 개구리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 덕분에 저는 무언가의 동력을 타인이 아닌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려대 독어독문학과라는 저의 학력은, 메가스터디 목표달성장학생들끼리만 모여도 별 것 아닌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만 더 멀리 두어도, 저보다 화려한 스펙을 가지고 질 좋은 경험들로 삶을 채워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사연자님의 '전국엔 저보다 잘하는 사람이 널렸을텐데' 라는 생각은 태어난 이상 평생을 하게 되는 생각일 것입니다. 대학에 온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당연하지만 잔인한 이치는 역설적으로 내가 지금 당장 가진 것이 없어도 나를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어차피 비교를 통해 나의 가치를 높이고 공허를 채우는 것이 불가능하니, 우리는 나의 태도 그리고 내가 하루를 사는 방식을 통해 삶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부끄러운 수험 생활을 했어도, 그래서 이번 여름이 너무나 잔인하게 느껴졌어도, 다 놓아버리지 말고 당장 오늘부터 귀한 내가 살아내는 하루를 정성껏 가꿔주세요. 이번에도 내가 나를 망치도록 내버려둔다면, 나는 알고 있는 찝찝함을 모른 척 한다면, 그래서 '나는 원래 열심히 못하는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당연해져 버리면 그때는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N수를 한다고 해결이 될 삶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9월 모의고사가 코앞이고, 수능은 3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은 시간은 앞으로 만날 수많은 좌절을 견디고, 무엇보다 수능 날 아침 세상에 단 한 사람 오직 나만 아는 기분을 후회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시간일 것을, 이미 지나온 제가 약속 드립니다.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이 아직 많지만 그래도 나아진 나를 칭찬해주어야 할 사람도, 더 할 수 있는데 딱 여기까지만 하고 있는 나를 다그쳐야 할 사람도 나입니다. 정말, 정말로 늦지 않았으니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P.S. 머리를 바꿨어요
...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