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스터디

연말의 공기는 늘 조금 다르게 내려앉습니다.

거리의 소음도, 방 안의 불빛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12월 31일만큼은 모든 것이 한 박자 늦게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달력의 마지막 칸을 손끝으로 넘기기 전까지, 우리는 자꾸만 “올해를 어떻게든 정리해야 한다”는 마음에 붙잡히곤 합니다.

그런데 정리라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정리한다는 건 늘 버리는 일이라고 배워왔지만, 어떤 것들은 버려지지 않습니다. 손톱처럼 깊숙이 박혀 있어서, 마음먹는다고 쉽게 빠지질 않습니다. 억지로 뽑아내려 하면 오히려 살이 더 아프고, 피가 더 오래 남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정리를 ‘삭제’가 아니라 ‘자리 배치’로 생각해보려 합니다.

어딘가에 묻고 오는 일 말입니다.

묻는다는 건 잊겠다는 뜻이 아니라, 흩어진 마음들에게 흙을 덮어주는 일입니다. 내 안에서 아무 때나 튀어나와 나를 흔들지 못하게, “너는 여기까지”라고 말해주는 일입니다. 떠나보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는 나를 파먹지 못하게 하려고요.

한 해를 보내며 누구나 그런 것들을 하나씩 품게 됩니다.

끝내 닿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고, 한 번의 실수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보다 더 조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되지’라고 스스로를 풀어주던 습관,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야’라고 마음을 접어버리던 순간들, 스스로를 재단하느라 하루를 다 써버린 밤들. 이름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밤이 오면, 어김없이 살아나는 것들입니다.

밤은 이상하게도 공평합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누구의 방문도 두드리지 않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밤은 낮에 눌러두었던 것들을 조용히 깨웁니다.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처럼, 정확히 내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잊은 줄 알았던 장면이 살아나고, 끝난 줄 알았던 감정이 다시 움직입니다.

특히 연말의 밤은 더 그렇습니다.

“올해는 왜 이랬을까”라는 질문이, 평소보다 더 쉽게 목까지 차오릅니다. 잘한 일보다 못한 일이 먼저 떠오르고, 버틴 시간보다 무너진 순간이 먼저 기억납니다. 누군가는 한 해 동안 꾸준히 달려온 자신을 칭찬하기보다, 마지막에 남은 빈칸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더 세게 몰아붙입니다.

“이렇게 해서 될까?”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못한 것 같아.”

그 말들이 단단해질수록, 하루는 더 무거워집니다. 스스로를 점검한다는 말로 포장해도, 결국은 나를 몰아세우는 방식으로 끝나는 밤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냈는데, 잠자리에 눕는 순간 다시 계산이 시작됩니다.

‘오늘의 나는 충분했나.’
‘내가 놓친 건 뭐였나.’
‘내일도 이렇게 버틸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데, 왜 나는 나를 가장 먼저 공격하고 있을까. 내가 내 편이 되어주지 않으면, 이 시간을 끝까지 건널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 같은 날에는 더 크게 결심하게 됩니다.

그만하자고.
더는 나를 못 살게 하지 말아 달라고.

각자의 처지는 다르지만, 연말의 마음은 어딘가 닮아 있습니다.

무언가를 떠나보내고 싶다는 마음.
그런데도 쉽게 떠나보낼 수 없다는 마음.

어떤 사람은 올해 내내 ‘견딤’이라는 단어와 함께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아도, 정해진 자리에 앉아 시간을 채워야 했던 날들. 괜찮은 척 웃고 돌아와, 문을 닫자마자 주저앉아버리던 밤들. 누군가에게는 그 자체가 이미 충분한 싸움이었을 텐데도, 자신만은 그 노력을 쉽게 인정해주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한 해를 끝냈는데도 마음이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끝냈다’는 말이 오히려 더 아프게 들리고, 마침표를 찍은 뒤에도 지워지지 않는 여운이 남아 있는 것처럼요. 누군가의 결과는 다짐을 칭찬받기보다 질문을 불러왔고, 새로 시작한다는 말은 용기라기보다 부담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제 막 낯선 계절의 입구에 서 있을지도 모릅니다.

처음으로 긴 시간표를 받아들고, 처음으로 ‘공부’라는 단어의 무게가 달라지는 시기입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먼저 조급해지고, 막연한 두려움이 밤을 먼저 차지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누구나 불안합니다.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불안함을 견디는 법을 아직 배우는 중인 것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오늘, 더 현실적인 작별을 해보고 싶습니다.

완벽하게 떼어내는 작별이 아니라, 경계를 세우는 작별입니다. 보내고 싶은 마음과 남아버리는 마음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선택은 “함께 두되, 중심을 내어주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흙은 덮되, 그 흙 위를 다시 걸어가는 것.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되, 그 먼지가 내게 무엇을 남겼는지까지 부정하지 않는 것.

이때의 흙은 망각이 아니라 밑거름입니다.

아쉬움의 흙, 좌절의 흙, 불안의 흙, 안일함을 반성한 흙, 다시 시작의 흙입니다. 그 흙은 때로 발목을 더럽힐 수도 있고, 신발을 무겁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흙이 없다면 우리는 서 있을 땅을 잃어버립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내일로 가는 사람은, 내일이 흔들릴 때 붙잡을 재료도 함께 잃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겨진 것들을 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패는 실패이고, 아쉬움은 아쉬움입니다. 때로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더 정직합니다. 다만 그 실패가 내 전부가 되지 않게 하는 것, 그 아쉬움이 내 하루의 주인이 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마음은 언제나 계획보다 솔직합니다.

오늘 묻어두고 돌아서도, 내일 다시 살아나는 것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 그럴듯한 말로, 더 정확한 기억으로, 더 날카로운 감각으로 돌아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봐, 결국 또 이렇잖아.” 

“너는 늘 이랬잖아.” 

“아직도 부족하잖아.” 

그때 우리는 다시 흔들릴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래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다시 살아나는 밤이 와도, 그 밤이 나를 전부 삼키게 두지는 말아야 합니다. 남겨진 것들은 남겨진 것들로 두고, 앞으로의 나는 앞으로의 나로 걸어가야 합니다. 실패를 미화하지도, 실패로 스스로를 고정하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혹시 오늘, 마음이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면, 그 말도 잠시 옆에 두었으면 합니다.

“나는 아직도 부족해.”
“나는 왜 이렇게 느릴까.”
“나는 결국 안 될 것 같아.”

그 문장들은 여러분의 본질이 아니라, 여러분이 지친 날에 쓰는 언어입니다. 지친 날의 언어는 언제나 더 잔인합니다. 그 잔인함이 진실인 것처럼 들릴 때가 있지만, 사실은 그날의 피로가 만든 착각일 때가 더 많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이상하게도,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새해’보다 ‘남은 것들’이 먼저 보였습니다.

새로 시작하겠다는 말보다, 아직 끝내지 못했다는 말이 더 크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남은 것들’을 조금 더 다정하게 다루고 싶습니다. 그것들을 끌어안자는 말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자는 말입니다. 마음 한편에 함께 두되, 마음의 중심을 내어주지는 말자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괜찮습니다.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내일의 내가, 오늘의 밤에게 먹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해가 지면 어김없이 살아나는 것이 있더라도, 그 밤을 지나 돌아오는 사람은 결국 내일을 손에 쥐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올해를 떠나보내는 이 밤의 끝에서, 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돌아서려 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일은, 멀끔하게 지워내는 일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보내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어떤 것들은 끝내 남아 우리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저는, 완벽한 작별 대신 더 현실적인 작별을 택해보려 합니다.

묻고 가겠습니다.

지워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더는 아무 데서나 나를 붙잡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으로요. 깊숙이 박힌 손톱이 잘 빠지질 않아도, 그 흙을 덮고 돌아서겠습니다.

여러분이 걸어온 하루들 위에 제 문장이 닿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어떤 날은 이겼고, 어떤 날은 졌고, 어떤 날은 그저 버텼을 뿐인데도, 그 모든 날들이 지금의 여러분을 여기까지 데려왔습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이 정도면 충분했어”라고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의 숨결을 남긴 채, 다음 REPLAY에서 다시 만나겠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밤을 통과하며, 또 한 번의 내일을 맞이하고 있을 테니까요.

가장 깊이 남은 것과
가장 조용히 작별하는 사람에게
내일은 언제나 천천히 열립니다.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다시 살아나는 밤에도
여러분이 전부 먹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흙을 덮고
불을 지르고
돌아서 나오는 마음이
끝내, 내일을 향해 남겨두는
그 한 줌의 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