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에서 이순신으로 끝난 전쟁

이름 : 김종웅
등록일 :
2020-10-05 10:04:48
|
조회 :
18,308

 

임진왜란 8

- 이순신”으로 시작해서 “이순신”으로 끝난 전쟁.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메가스터디 역사 강사 김종웅입니다. ^^
캐스트 영상이 아닌 글로 임진왜란 이야기를 하게 되어 정말 죄송스럽고 미안합니다.

마무리를 멋지게 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되었음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 부탁 드릴게요~~ㅠㅠ

 

 

우리는 지난 시간에 여러 의병의 활약으로 인해 곡창지대였던 전라도를 지켜내었다는 이야기를 살펴봤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과연 명나라가 그렇게 큰 도움이 되었는지, 그리고 임진왜란의 마지막은 어떻게 될지에 대해 언급만 하면서 마무리를 했었죠.

임진왜란의 마지막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해볼게요!!

( 지난 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 클릭 )

 

 

 

'日本之人變詐萬端 自古未聞守信之義也
왜는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이순신-

  


#1. 명의 지원군

 

1592년 6월, 평양까지 진격한 일본군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주춤거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수군과 의병의 활약, 그리고 선조의 몽진이었죠.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전쟁 중에 왕을 잡거나 해당 지역을 장악하게 되면,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영주에게 복속되는, 영주의 소유물처럼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백성들은 해당 지역의 관리가 도망가고, 책임자가 죽어가는 중에도 의병을 일으켜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거죠.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활약, 여기에 더해 왕이 성을 버리고 도망(몽진)가는 상황까지. 일본군은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해서, 수군의 지원이 끊기면서 발생한 보급의 문제 등등으로 인해 더 이상 북쪽으로 진격하지 못한 거죠.

 

이 무렵 명나라의 지원군이 도착을 합니다. 그렇다면 선조가 그렇게 높이 칭송하던 명나라의 도움이 그렇게 컸을까. 이 부분을 확인해보기 전에 명나라의 입장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의 명은 국내외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대내적으로는 만력제(신종)가 정치에 손을 놓고 있었고, 북으로는 몽골이 여전히 강성하여 국경 지방의 긴장감이 상당히 높았죠.

이런 상황에 조선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옵니다. 그것도 일본이 쳐들어왔다면서 말이죠. 명은 생각합니다.

 

‘조선, 이것들이 일본과 함께 힘을 모아 우리 명을 치려는 거 아냐?!’

 

의심을 하기 시작했죠. 실제로 명은 조선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너희들은 옛 당태종을 물리치고 몽골을 물리친 민족 아니냐.’
(하아... 깊은 한숨.. 우리, 이런 민족인데..)

 

명은 생각했습니다. 해안가에서 노략질이나 일삼던 왜놈들에게 전쟁 발발 20여일 만에 수도 한양이 함락되었다니, 조선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뚫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죠. 해서 실제 관리를 파견해서 일본군의 주둔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지원군 파병을 결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무튼!! 이렇게 해서 명이 지원군을 보내줍니다.

그럼, 명은 정말 조선을 위해서! 조선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군대를 보낸 것일까?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는 감정적인 것이 아닌, 현실적인 관계입니다. 이해관계가 우선된다는 거죠. 명은 일본이 조선을 점령했을 경우, 그 힘을 바탕으로 압록강을 넘어 요동까지 진격할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해서, 명은 자신들의 방어 라인을 위해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꼭! 필요했던 것이죠.

 

그렇게 해서 명은 여진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던 조승훈이라는 장군을 보내어 평양성을 탈환하게 하였는데, 평양성 앞에 도착한 조승훈은 명군의 위세에 일본군이 성을 비웠다고 생각하여 평양성 안쪽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의 함정이었죠. 거의 전멸... 조승훈은 간신히 살아 돌아와서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명에 조선군이 투항하는 바람에 전투가 불리해졌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이에 우리의 선조는 명에 이 부분을 해명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죠.. 전쟁 중인데 말이죠~ㅠㅠ

 

이어서 전개된 평양성 탈환 전투는 모두 일본군의 저항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이때 명에서 온 심유경이라는 사람이 일본군의 고니시와 휴전 회담을 하여 50여일간 휴전하기로 합의를 합니다. 이때 조선은 일본군이 군량미도 떨어지고 지칠 대로 지쳐있으니 공격하자고 하지만, 명은 반대를 합니다. 우리나라 전쟁인데, 우리가 전시 작전권이 없는 셈이었던 거죠. 하지만, 평양성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의병과 일본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2. 겨울

 

1592년. 4월에 전쟁이 발발하고 20여일 만에 수도 한양이 함락되었지만 일본군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은 장기전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겨울이 오게 되었죠. 당시 일본군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부족한 보급과 추위였습니다. 남쪽에서만 살아온 일본군에게 조선 북부 지방의 추위는 정말 무서웠습니다. 일본군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1592년 12월. 한겨울에 명에서 이여송이 이끄는 4만의 명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옵니다. 이어 1593년 1월에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이에 일본의 고니시 부대는 평양성을 버리고 도망가게 되었죠. 우리가 평양성을 탈환한 것입니다.

기세를 몰아 명의 이여송은 기병 1천명 정도를 이끌고 벽제관 일대의 일본군을 공격! 하였으나, 매복과 기급에 의해 패하게 됩니다. 이에 이여송은 한양까지 진격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개성으로, 그리고 평양까지 군사를 돌려 후퇴하게 됩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당시 조명 연합군이 총 공격을 단행하여 한양을 쳤더라면 일본군은 물러났을 겁니다. 아쉬운 부분이었죠. 명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 전쟁도 아닌데 굳이 병사들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전투를 하고 싶지는 않았던 거죠. 이때부터 명은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외교 회담을 통해 전쟁을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죠.

 

 

 

#3. 행주대첩

 

일본군이 평양과 황해도 인근에서 한양으로 철수하던 시기, 일본군을 쫒던 권율 장군의 3천명정도의 부대는 행주산성에 고립되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일본군은 전세를 역전시키지 위해 3만의 대군을 이끌고 행주산성을 공격하게 됩니다. 미리 설치한 목책과 화포 공격을 통해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었지만, 새벽 5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어지는 치열한 전투, 그리고 일본군의 물량 공세에 결국엔 성문이 열리게 되었죠. 권율 장군과 많은 병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처절하게 막고 있었던 그때, 조선군의 화살이 모두 떨어지게 됩니다.

이제 성이 함락되는구나 싶었는데, 한강 하류에서 조선의 배가 접근하는 것이 보입니다. 행주산성 안쪽까지 들어와서 공격을 하던 일본군은 조선의 수군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다고 판단! 겁을 먹고 우왕좌왕 하게 되죠. 그만큼 조선의 수군에 대한 일본군의 두려움이 엄청났다는 거죠. 이때 조선의 배는 수군의 배가 아닌, 충청 수사 정걸이 화살을 싣고 온 배였습니다. 이렇게 화살을 보급 받은 조선군은 일본군을 끝내 물리치게 됩니다.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기억되는 행주대첩입니다. 이후, 일본군은 재차 행주대첩을 공격하는데 권율 장군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파주로 군대를 물리게 됩니다.

 

 

 

#4. 휴전 협상

 

1593년 3월, 명의 이여송은 일본의 고니시와 휴전협상을 하게 됩니다. 긴 협상 끝에 4월, 명과 일본은 강화에 합의하게 됩니다.

아쉬운 부분은 우리나라가 직접적인 피해 국가이고 전쟁을 치르는 당사국인데도 휴전 협상에 참여하거나 의견을 내지도 못했다는 부분이 너무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런 부분은 한국 전쟁에서도 볼 수 있었죠. 국력을 키워야 하는 역사적 교훈입니다.

무튼!! 강화 협상에서 일본은 조선 8도 가운데 남쪽의 4개도를 할양할 것, 명나라 공주를 히데요시의 후궁으로 삼을 것, 명과의 교역을 재개할 것,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볼모로 보낼 것 등을 요구하였는데, 일본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일부 수용한다는 내용의 강화를 체결한 것입니다. 이렇게 일본군은 철수를 하게 됩니다.

 

1593년 4월 20일. 일본군이 철수한 한양의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징비록에는 당시 한양의 모습이 남아있는데,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시체와 황폐화된 도시의 모습, 태반이 굶어서 죽기 직전의 모습인데다 심지어 기어다니는 젖먹이 아기가 죽은 엄마의 젖을 먹기 위해 시체 위를 기어오르는 모습을 보았다는 등의 기록이 있습니다. 게다가 점점 날이 풀리고 더워지면서 시체들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고 합니다. 하아...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참혹하고 무서운 것인지, 우리는 겪어보지 못했지만 이런 역사를 통해 경험할 수 있죠. 절대, 전쟁은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무튼!! 조선의 류성룡은 후퇴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명나라 장수 이여송에서 끊임 없이 주장했지만, 이여송은 싸울 마음이 없었고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거절했습니다. 이에 일본군은 큰 저항 없이 남해안의 왜성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히데요시는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라고 하는데, 이렇게 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5. 2차 진주성 전투

 

1593년 6월 22일. 일본은 9만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하게 됩니다. 당시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조선은 명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여송과 심유경은 오히려 일본에 진주성을 넘겨주는 게 낫다면서 원군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의병장 곽재우 역시 9만의 병력을 보고는 진주성을 지키는 것이 자살행위라 판단하여 군사를 물렸고 오직 충청 병사 황진,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희 등의 소수 장수만이 병력 6천명정도를 이끌고 진주성을 지키게 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쉽게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일본은

 

“대국의 군사도 항복하였는데, 너희 나라가 감히 저항을 하느냐”

 

라는 내용의 글을 성으로 보냈습니다. 즉, 명도 일본에게 항복을 했는데 조선 너희가 어찌 저항을 하느냐는 말이었죠. 이에 조선군은 그저 있는 힘을 다해 너희와 싸울 뿐이라며 항전의 의지를 다졌습니다. 이어진 전투에서 잘 막아 싸웠으나 6월 28일, 황진 장군이 일본군이 쏜 조총에 머리를 맞아 사망하게 됩니다. 이에 지휘관이 사라진 조선은 급속도로 무너졌고 6월 29일, 일본에 의해 진주성이 함락되게 되었습니다.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조선군과 백성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 수가 우리 측 기록에 따르면 6만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진주성을 점령한 일본이 몇 차례 전라도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의병 부대에 막히게 되자 일본은 군을 물려 철수하게 됩니다.

이렇게 임진년 4월에 일어난 전쟁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6. 이순신과 원균, 그리고 정유재란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사이에 강화가 진행되어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의 왜성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에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평화가 찾아오나 싶었는데, 심유경과 고니시가 중간에서 명과 일본의 입장을 조율하여 강화 내용을 적절하게 위조하면서 맺는 것이었기 때문에, 명과 일본의 강화 체결에 대한 입장차가 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문제는 조선이 너무 무능했음이 안타까웠다는 겁니다. 명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조선에게 돌리며 명 황제가 속방을 우대함이 이렇게 깊은데 너희 나라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라면서 전쟁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는 식의 외교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심지어 명은 조선을 3개로 나누어 일본이 침입하는 것을 막아내는 명의 속방으로 삼겠다고 의견을 보내기도 합니다. 또 일본에서는 히데요시가 조선이 명과의 협상을 방해하였다면서 조선을 재차 침략하였습니다.

이것이 정유년에 재차 난이 일어났으니, 정유재란입니다.

 

당시 우리 조정에서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ㅜㅜ 전쟁이 발발하자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의주로 피난을 갔던 선조는 절대 강화 체결은 안 된다면서 강화 반대를 계속 주장하였습니다. 게다가 왕을 안 하겠다면서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겠다고 했는데, 보통 이러면 신하들이 “저~~언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아니되옵니다.” 이런 식으로 반대를 하잖아요. 근데 선조는 “그래? 알았어.” 이런 식으로 선위 소동을 몇 차례나 일으키게 됩니다. 나라는 쑥대밭이 되어 어지러운데 이런 정치적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던 거죠. 또한, 당시 도적들을 잡아들인다는 명목으로 의병장 및 의병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죽이고 처벌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으니, 그 모습을 본 백성들은 어땠을까요.

 

한편,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꾸준히 정부의 지원 없이 판옥선을 늘리고 병력을 재정비하고 군량미를 준비하는 등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전라좌수영이었던 여수에서 한산도 견내량으로 본영을 옮긴 이순신은 90여척이던 판옥선을 180여척까지 늘리는 등의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의 수군은 웅포, 당항포 등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지만 일본 수군이 해안가에 쌓은 왜성에 들어가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고 숨어들어가는 전술을 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순신은 전공을 세우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잘 몰랐던 선조는 계속해서 일본군을 공격하라 명령합니다. 이에 이순신은 육군의 지원을 요청하여 육군과 함께 싸우는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합니다....ㅠㅠ

 

이때!! 어김 없이 등장하는 그 인물, 원균이 등장합니다. 이순신과 원균은 이 당시 상당히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결국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로 발령 내면서 둘을 떼어놓게 됩니다. 충청도로 간 원균은 한양의 대신들에게 뇌물까지 주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어필하게 됩니다. 이순신이 자신의 전공을 가로챘다, 왜적과 싸우는 것을 일부러 피하는 것이다 등등의 내용을 끊임없이 내비쳤고, 결국 이러한 내용은 조정에까지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무렵, 가토 기요마사가 거제도로 진격한다는 일본 측 소식이 조정에 들어옵니다. 이에 선조는 1597년 1월 21일. 이순신에게 출진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것이 일본의 함정임을 알고 있었고, 분명 역습을 당할 것이라 판단하여 출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가토는 이미 상륙을 마친 상태였으니, 이순신의 말이 맞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왕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잡아들이고 원균을 이순신의 후임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원균에게 수군통제사가 되었음을 축하하자 원균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통제사가 된 것 보다는 이순신에게 복수해서 상쾌하다.”
.........후우.........

 

선조는 왕명을 어겼으니 이순신을 사형시켜야 한다면서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이산해와 윤두수, 그리고 류성룡도 이순신의 사형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원익이 선조에게 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순신이라 하였고, 정탁 역시 이순신을 변호하였습니다. 이에 선조는 백의종군을 명하게 되었죠. 이때 이순신은 국문을 당했는데, 고문을 당하면서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다고 하죠....

 

이렇게 큰 고난을 겪고 풀려난 지 열흘이 되던 1597년 4월 11일. 이순신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려고 무리하게 배를 탔다가 숨을 거두게 됩니다. 연세가 많으신 어머니께서 고문당한 아들을 만나기 위해 그 힘든 몸을 이끌고 배를 탔다는 소식을 접한 이순신의 마음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일본 수군이 다시 조선을 침입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에서 군사를 내어 일본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원균은 6월 18일, 90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출진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에 막힌 원균이 아무 성과 없이 바로 후퇴하여 한산도 견내량으로 돌아오자 권율이 원균을 불러 크게 혼을 냈습니다. 이에 원균은 술을 퍼부어 마시면서 불만을 토로했고, 결국 7월 5일 홧김에 수군을 이끌고 부산으로 진격하게 됩니다. 결과야 예상하듯 패전하게 되었고, 칠천량 인근에 머물렀을 때 권율은 원균을 불러 곤장까지 때립니다. 오죽 답답하고 한심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부분입니다. 이에 원균은 또 다시 술을 마셔대었고, 며칠이 지난 7월 15일,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일본 수군과 고니시의 일본 육군이 조선 수군이 머무르고 있던 칠천량으로 총 공격을 해왔고 겁을 먹은 원균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습니다. 최악의 해전으로 꼽히는 칠천량 해전의 결과 조선 수군은 거의 전멸하였고 이억기 등의 유능한 장수들도 모두 전사했습니다. 오직 경상 우수사였던 배설이 미리 12척의 배를 빼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정유재란 당시에는 조선의 수군이 일본 수군에 의해 쉽게 무너지자 일본 육군은 곡창지대였던 전라도로 바로 진격하게 됩니다. 여러 지역에서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지만 결국 남원성, 전주성이 함락되면서 전라도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게 되었습니다. 특히 남원성 전투에서의 학살을 일본인이 기록으로 남긴 것이 있는데, 조선인 아이들을 들짐승 몰듯이 한군데로 몰아 죽이고, 그들이 부모를 모두 베어 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정유재란 무렵부터 히데요시는 조선인의 코를 잘라오라고 했는데, 이렇게 베어간 코로 포상을 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경쟁적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조선인 코 무덤이 있는데 그곳에 묻힌 조선인 코는 약 12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정말 화가 나는 것은 그렇게 우리 선조들의 코를 묻은 코무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덤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히데요시의 무덤에서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다는거죠......

 

 


#7. 명량대첩
 
한편, 8월 3일,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다시 임명하였습니다. 문제는 임명만 했을 뿐 조선 정부에서는 이순신에게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은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병사를 모집했고 수군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이순신이 다닌 거리가 약 330km에 달합니다. 이순신이 다시 수군을 정비한다는 소식에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후임으로 있던 김억추가 판옥선 1척을, 거기에 배설이 판옥선 12척을 가지고 와 이순신은 13척의 판옥선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때 선조는 수군은 이미 희망이 없으니 육군과 합류해서 싸우라고 명합니다. 이에 이순신은 이렇게 답합니다.

 

“임진년부터 적들이 감히 충청 전라도로 진격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남아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 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전선이야 비록 적지만,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수군을 재정비한 이순신은 진도에 있는 벽파진에서 진을 쳤습니다. 이순신이 수군을 재건한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 수군은 대함대를 파견해 해남의 어란진에 다다랐습니다. 9월 15일, 결전을 앞둔 이순신은 병사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자고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하였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구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9월 16일. 일본 수군이 울돌목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난중일기에는 130여척이라고 되어있지만 실제 수송선까지 하면 수백 척의 일본군 함대가 울돌목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를 막아 싸우는 조선 수군의 배는 13척. 일본군을 맞이한 이순신은 공격을 명하였지만 겁에 질린 조선 수군은 공격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홀로!! 대장선 단 1척의 배만 적선을 향해 나아갔고, 이순신은 100대 1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면서 단 한척의 배로 한동안 적의 함대를 막아내는 활약을 펼칩니다. 이순신은 초유기를 세워 함대를 불렀고, 용기를 낸 안위와 김응함의 함대가 이순신과 합류했습니다. 이제 3척이 된거죠. 하지만 여전히 일본의 함대는 수백 척이었습니다. 3척의 함대가 수백척의 일본군을 상대로 막아내는 모습을 본 다른 장수들도 하나둘씩 전선으로 나왔고, 이렇게 13척의 판옥선은 우세한 화력을 바탕으로 일본군을 격침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물살도 바뀌어 조선 수군에서 일본군 쪽으로 흘렀고, 이 물살을 타고 일본 수군을 향해 진격하면서 일본 함대를 격파했습니다. 이에 일본 수군은 후퇴하게 되었고 조선 수군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영화 명량으로 잘 알려진 명량대첩입니다.

 

 


#8. 성웅 이순신

 

명량에서 큰 승리를 거둔 이순신. 우리의 선조는 그 소식을 듣고!!! 이순신의 공을 깎아내리면서 은 스무냥을 하사했을 뿐이었습니다. 반면 명나라에서는 승리르 축하하며 백금과 비단을 보냈는데, 이를 보고 선조는 장수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거 너무 과한 것 아니냐는 말을..했..습...니....다.....

 

명량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고군산군도까지 후퇴하여 수군을 재정비합니다. 그러면서 군량미도 확보하고 칠천량에서 도망갔던 수군들이 돌아오면서 칠천량 이전의 수준까지 수군을 다시 정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무렵, 명량에서 대패한 일본이 복수를 하기위해 이순신의 가족이 있던 아산을 공격하여 막내아들을 죽였습니다.  전쟁 중에 많은 분들이 가족을 잃었고,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당시 이순신의 심정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한편, 일본 육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한양으로 진격합니다. 충청도 직산 전투 이후 한양으로 진격하던 일본군은 명량에서의 패배 소식을 접합니다. 이에 보급이 끊기는 것을 걱정했던 일본 육군은 퇴각을 결정했고, 일본은 남해안 일대의 왜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던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습니다. 이에 일본군이 철수할 움직임을 보이자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남해안 일대로 진격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 육군의 전력은 여전히 강력하여 쉽게 승리하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수군의 이순신이 고니시가 방어하고 있던 순천 왜성을 공격하여 적선 30척을 격침하고 11척을 나포하는 등의 전공을 세웠지만, 명 수군이 지원을 하지 않아 순천 왜성을 함락하지는 못했습니다.

11월이 되자 순천의 고니시 부대가 철수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신은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게 됩니다. 이에 고니시는 뇌물을 통해 명 장수를 매수하여 사천을 비롯한 인근에 있던 일본 수군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에 시마즈와 요시토시가 이끄는 일본 수군 500여척의 배가 순천으로 향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일본의 구원군이 오기 전에 먼저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정.

 

11월 19일 새벽.

 

이순신의 60여척 판옥선은 노량에서 일본군을 막아 세우며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명 수군 역시 참전했으나 일본군의 집중 공격으로 거의 전멸하였고, 조선의 수군만이 일본군을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이 일본의 배를 200여척이나 침몰시키면서 공격을 가하자 수세에 몰린 일본군이 필사적으로 이순신 함대에게 달려들었고 근접전이 펼쳐지게 됩니다.

 

오전 8시 무렵.

 

적의 총탄이 이순신을 관통하였고, 그렇게 쓰러진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전사했습니다.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렇게 1592년 4월부터 1598년 11월까지의 긴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임진왜란은 이순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순신으로 끝을 맺게 된 전쟁으로도 볼 수 있는데. 조선과 일본, 명나라까지 모두 참전한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은 세 나라의 운명을 모두 바꿔놓았습니다. 조선은 예전의 국력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고 명은 세력이 약화되어 후금(청)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후금(청)은 중원을 장악하여 새로운 왕조 시대를 열었습니다. 일본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에도막부가 수립되면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2020년을 살아가는 후손된 입장에서 16세기 후반의 이 전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단지 흥미로운 전쟁사다, 라는 관점보다는 우리의 지난 역사를 교훈으로 잘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일개 강사의 부족함 많은 역사 이야기였지만, 많은 분들께서 우리 역사에 흥미를 갖고 사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랑스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이고,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입니다. 지난 일들을 교훈 삼아 더욱 발전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주시길, 올바른 역사관을 가져주시길, 여러분께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임진왜란 이야기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日本之人變詐萬端 自古未聞守信之義也
 왜는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이순신-

 

 

 

 

  • 역사
  • 한국사
  • 김종웅
  • 임진왜란
선생님
강사홈

한국사·역사

김종웅 선생님

  • ☆ 긍정의 힘!☆
  • ☆ 나를 만드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 * 현) 메가스터디 사회탐구 한국사/역사 강사
  • * 현) 메가스터디 러셀 강남. 분당, 평촌, 영통, 부천, 센텀 출강
  • * 전) 고등학교 교사
등록

- 300자 이내로 작성해주세요. - 운영방해, 도배성 글, 불법/유해 정보, 특정 대상 비하, 비방, 욕설이 포함된 내용을 게시할 경우 고지 없이 삭제 및 이용이 제한되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고소·고발 등 법적 조치를 받을 수 있습니다.